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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33장 중 8장
庄子
덧붙은 발가락과 갈라진 손가락은 타고난 것이기는 하나 덕에는 군더더기요, 덧붙은 혹과 달린 군살은 형체에서 생겨난 것이기는 하나 본성에는 군더더기라. 인의를 여러모로 펼쳐 쓰는 자는 그것을 오장처럼 여기나, 도덕의 바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발에 덧붙은 발가락은 쓸모없는 살이 이어진 것이요, 손에 갈라진 손가락은 쓸모없는 손가락이 돋아난 것이다. 오장의 정에 여러 가지 덧붙이고 갈라지게 한 자는 인의의 행실에 음탕하고 치우치며, 총명의 쓰임에 여러 갈래를 더한 것이다.
그러므로 밝음에 치우친 자는 오색을 어지럽히고 문채를 지나치게 하여, 푸르고 누런 바둑무늬의 번쩍임이 어찌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랴. 이제(離朱)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총명함에 지나친 자는 오성을 어지럽히고 육률을 지나치게 하여, 쇠와 돌과 실과 대나무, 황종과 대려의 소리가 어찌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랴. 사광(師曠)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인에 갈라진 자는 덕을 끌어올리고 성을 막아名声을 거두어들이며, 천하로 하여금 떠들썩하게 다투어 미치지 못할 법을 받들게 하니 어찌 그런 것이 아니랴. 증삼(曾參)과 사구(史鰌)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변론에 치우친 자는 기왓장을 쌓고 새끼를 꼬듯 글귀를 꿰고, 견백(堅白)과 동이(同異) 사이에 마음을 노닐게 하며, 지치도록 헛된 말을 칭송하니 어찌 그런 것이 아니랴.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모두는 덧붙고 갈라진 곁가지의 도일 뿐, 천하의 지극히 바른 도가 아니다.
저 지극히 바른 도는 성명의 본정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합쳐진 것이 덧붙음이 되지 않으며, 갈라진 것이 치우침이 되지 않는다. 긴 것은 남음이 되지 않고 짧은 것은 모자람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오리의 다리는 짧으나 이어 붙이면 근심이 되고, 학의 다리는 길으나 잘라 내면 슬픔이 된다. 그러므로 본성이 긴 것은 잘라서는 안 되고, 본성이 짧은 것은 이어서는 안 되니, 없앨 근심이 없는 것이다.
아, 인의는 어찌 사람의 본정이 아니란 말인가. 저 어진 사람들은 어찌 그리 근심이 많은가. 또 발가락이 붙은 자는 쪼개면 울고, 손가락이 갈라진 자는 물어뜯으면 운다. 이 둘은 혹 수가 남거나 혹 수가 모자라지만, 근심에 있어서는 같다. 지금 세상의 어진 사람들은 눈을 찌푸리며 세상의 근심을 걱정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들은 성명의 본정을 찢어 버리고 부귀를 탐한다. 그러므로 인의는 어찌 사람의 본정이 아니란 말인가. 삼대 이후로 천하가 어찌 그리 시끄러운가.
또한 먹줄과 곡척과 컴퍼스와 곱자를 기다려 바르게 하는 것은 그 본성을 깎는 것이요, 새끼와 끈과 아교와 옻을 기다려 굳게 하는 것은 그 덕을 침해하는 것이며, 예악으로 굽히고 부리며 인의로써 어르고 달래서 천하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그본래 그러한 상태를 잃는 것이다. 천하에는 본래 그러한 상태가 있다. 본래 그러한 상태란, 굽은 것은 곡척을 쓰지 않아도 굽고 곧은 것은 먹줄을 쓰지 않아도 곧으며, 둥근 것은 컴퍼스를 쓰지 않아도 둥글고 모난 것은 곱자를 쓰지 않아도 모나며, 붙는 것은 아교와 옻이 아니어도 붙고 묶이는 것은 새끼가 아니어도 묶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가 저절로 모두 살아나면서도 그렇게 살아나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함께 모두 얻으면서도 그렇게 얻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옛날과 지금이 둘이 아니니, 손상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의가 어찌하여 아교와 옻과 새끼와 끈처럼 이어지고 이어져 도와 덕 사이를 노닐면서 다니는가. 천하를 미혹되게 할 뿐이다.
작은 미혹은 방향을 바꾸고, 큰 미혹은 본성을 바꾼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우씨(虞氏)가 인의를 내세워 천하를 어지럽힌 이래로, 천하 사람들은 인의를 위해 달려가기를 명령에 따르듯 하였다. 이 어찌 인의로써 그 본성을 바꾼 것이 아니랴.
그러므로 시험 삼아 논하여 보겠다. 삼대 이후로 천하 사람들은 물건으로써 그 본성을 바꾸지 않은 이가 없었다. 소인은 이익을 위하여 몸을 바치고, 선비는 명예를 위하여 몸을 바치며, 대부는 집을 위하여 몸을 바치고, 성인은 천하를 위하여 몸을 바친다. 그러므로 이 여러 사람들은 하는 일이 다르고 이름도 다르지만, 본성을 상하게 하고 몸을 바친다는 점에서는 하나이다.
장(臧)과 곡(穀) 두 사람이 함께 양을 치다가 모두 그 양을 잃었다. 장에게 무엇을 하였는지 물으니 책을 끼고 읽고 있었다. 곡에게 무엇을 하였는지 물으니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한 일은 다르지만 양을 잃은 점에서는 같다.
백이는 명예를 위하여 수양산 아래에서 죽고, 도척은 이익을 위하여 동릉 위에서 죽었다. 두 사람이 죽은 바는 다르지만 삶을 해치고 본성을 상하게 한 점에서는 같다. 어찌 반드시 백이를 옳다고 하고 도척을 그르다고 하겠는가.
천하가 모두 몸을 바친다. 그들이 바친 것이 인의이면 세속에서는 군자라 이르고, 그들이 바친 것이 재물이면 세속에서는 소인이라 이른다. 그 바친 것은 하나인데 군자가 있기도 하고 소인이 있기도 하다. 만약 그 삶을 해치고 본성을 손상시킨다면 도척도 백이일 뿐이니, 어찌 그 사이에서 군자와 소인을 취하겠는가.
또한 그 본성을 인의에 붙이는 자는 비록 증삼과 사구처럼 통달하였다 하더라도 내가 말하는 착함이 아니다. 본성을 오미에 붙이는 자는 비록 유아(俞兒)처럼 통달하였다 하더라도 내가 말하는 착함이 아니다. 본성을 오성에 붙이는 자는 비록 사광처럼 통달하였다 하더라도 내가 말하는 총명함이 아니다. 본성을 오색에 붙이는 자는 비록 이제처럼 통달하였다 하더라도 내가 말하는 밝음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착함이란 인의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 덕에 착할 뿐이다. 내가 말하는 착함이란 인의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성명의 본정에 맡길 뿐이다. 내가 말하는 총명함이란 저 남을 듣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들을 뿐이다. 내가 말하는 밝음이란 저 남을 보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볼 뿐이다. 스스로를 보지 못하고 남을 보며, 스스로 얻지 못하고 남을 얻는 자는, 남의 얻음을 얻고 자기 자신의 얻음을 얻지 못하는 자요, 남의 편안함을 편안하게 여기고 자기 자신의 편안함을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는 자이다.
남의 편안함을 편안하게 여기고 자신의 편안함을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는 자는, 비록 도척과 백이라도, 이는 같이 음탕하고 치우친 것이다. 나는 도덕에 부끄러워하여 위로는 감히 인의의 지조를 받들지 못하고 아래로는 감히 음탕하고 치우친 행실을 하지 못한다.
《骈拇》篇提出一个极具颠覆性的伦理学命题:道德本身可能是一种异化。
通常我们认为道德是“好”的,仁义是“善”的。但庄子追问的是:当仁义成为外在规范,当道德成为社会评价的标准,当“做好人”变成一种需要“奔命”去完成的任务时,它还算得上“好”吗?这触及了一个深层的哲学问题:价值的内在与外在之分。
在庄子看来,“德”是人得之于道的内在禀赋,“性”是人与生俱来的本然状态。真正的善(“臧”)不是合乎外在的道德规范,而是“任其性命之情”。这意味着:道德不应是外部施加的标准,而应是内在本性的自然流露。一旦道德变成外部的“钩绳规矩”,它就反而成了“削其性”的工具。
这个思路与存在主义的某些洞见不谋而合。海德格尔区分“本真”与“非本真”的存在,萨特强调人不应被外在定义所奴役,归根结底都在说同一件事:不要让别人替你决定你是谁。庄子的独特之处在于,他不仅指向“自由”,更指向“自然”——自由不是随心所欲,而是回归本性。
另一个值得深思的问题是:差异与平等的悖论。庄子说“合者不为骈,枝者不为跂;长者不为有余,短者不为不足”,这是在取消“正常”这一概念。所谓“正常”不过是一个统计学的平均值被包装成了规范。野鸭的短腿和鹤的长腿,各自都是“正”的。这提示了一种比现代多元主义更彻底的立场:不仅容忍差异,而且从根本上取消“正常/异常”的划分。这种思想在今天依然具有解放性力量。
本内容基于道家经典古籍,仅供传统文化学习与人生参考,不构成宗教、医疗或投资建议。